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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고귀함

 


글 : 프레데릭 보데
번역 : 구모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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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주 작가의 작품이 유럽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5여년 전부터이다. 현대 도예의 흐름과 함께 하는 작가의 세계는, 작품이 가진 극적 긴장감, 인간의 불안과 어두운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힘을 특징으로 한다. 서울에서 파리, 그리고 브뤼셀에서 도예를 공부한, 이 뛰어난 재능의 한국 작가는 계속해서 두 대륙을 오가며 훌륭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의 직관적이고 강렬한 표현력은 유약을 바른 표면의 색과 몸짓, 작품을 준비하며 그린 드로잉에서도 느낄 수 있는, 강한 생명력과 관계가 깊다. 작가는 자연스럽게 무의식의 궤도를 탐구하고, 접근이 어려운 미로를 완성도 높은 조형물로 표현하는데, 이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쉽지 않고 또한 진부하지 않은, 개인적 언어의 점진적 발전에서 비롯되며 이런 엄격함을 통해 보편성을 확보한다.

 

내부의 트라우마들을 ‘형상화’하려는 의지가 모든 리얼리즘, 지나치게 구체적인 모든 서사를 거부한다. 세상은 ‘연극적’인 방식으로 암시적이게 표현되고, 가공된 유기체는 죽음을 마주한 인간 운명의 메타포가 된다. 작가가 숨을 불어넣은 인간 또는 동식물의 형상들, 그 흘러내리며, 방황하고, 변화 중인,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 고집스럽게 우리의 시선 가운데 ‘자리를 잡는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최초의 두려움을 깨우기 때문이다. 비밀스럽고도 끈질긴, 이름이 없는, 혼합의 영혼이 나타난다. 작가의 강인하고 관대한 작품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 이후, 1960년대에 등장한) 일본의 전위 예술 부토를 떠올리게 하고, 기품 있는, 영적 고양에 대한 열망을 온전히 구현한다. 예술이 ‘검은 몸의 춤’을 정화하려 하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나타난, 카타르시스적 행위의 상징적 폭력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또 다른 예술 운동 구타이는 물질과 영혼의 화해라는 관점에서 몸을 사용해 육체의 회복을 기했다.

 

김명주 작가의 도예 조각과 드로잉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창백하거나 새빨간 상징의 색, 핏기 없는 가면과 같은 얼굴, 벌거벗은 몸, 깊이 숙고한 미니멀하고 시적인 공간 등이 부토와 구타이 예술의 영향을 짐작해 보게 한다. 위태로운 무언극이 상처 난 흙의 형상들의 사지에서(손, 발, 날개 혹은 나뭇가지)에서 시작되는 듯하며, 불현듯 도예 물질로 다시 응고되어 버린다… 이렇게 우리 눈앞에, 부토에서와 같이, 곤궁과 고뇌와 자기 내부를 향해가는 움직임의 이미지들, 놀람과 연민과 새롭게 세상을 살아갈 채비가 된 씨앗의 이미지들이 교차한다.

 

작가가 신중하고 진지하게 만들어 나가는 환상 세계의 거주자들은, 에드가 앨런 포의 가장 환각적인 단편소설 속, 실존보다는 유령으로 가득찬 세계를 살아가는 명멸하는 엄숙한 형상들, 몸이 없는 얼굴들, 팔다리를 잃은 몸들을 연상시킨다. <눈의 손수건을 쓴 백합>에서처럼 식물이나 혼합된 동물, 시든 꽃잎 여기저기 생겨나는 초현실적이고 강박적인 ‘카코딜산염의 눈’(프란시스 피카비아의 작품명)이 증식되는 작품을 마주할 때는 어떤 전율을 느끼게 된다. <나무>에서는 핏기 없는 눈빛의 피에로 뤼네르를 닮은, 쇠약해지는 붉은 시선의 하얀 잎들-가면들이 아득히 매혹적인 슬픈 표정을 간직하며, 1885년에 발간된 오딜롱 르동의 고야 오마주 판화집 속 <늪지의 꽃>을 생각하게 한다.

이 혼미와 떨림의 세계는 강렬한 변신의 힘을 갖고 있고, 인간의 고통과 희망을 껴안은 동식물들은 그 고통과 희망을 구현해낸다.

 

김명주 작가의 작품들이 보여 주는 경이로운 힘의 많은 부분은,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굽기를 반복하며, 고통의 형상들에게 ‘색을 입혀’ 회화적 감각과 촉각적 관능을 더하는 작가의 놀라운 능력에서 비롯된다. 강렬해진 표면이 이글거리고, 부두교의 제단처럼 ‘채워진다’. 흘러내리는 흰색은 새어나오는 기분, 타오르는 촛불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짓무른 빨강은 형상들의 피부 위에 남은 상처 자국처럼 고통스럽다. 깊은 골짜기의 초록은 우리를 날숨의 동굴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밤처럼 부드러운 파랑은 우리가 상상했던 순결한 꽃들을 어둠으로 감싼다. 유독한 검푸른빛과 피로 물든 적분홍빛은 번갈아가며 커다란 ‘백합’을 만들어내는데, 그때에도 언제나 몸은 여기에 있다.

 

형식적 간결함에 대한 열망, 작품 표면의 질감 속에 불어 넣어진 풍요로움의 솟구침, 그 사이에서 작가는 정신분석학적의 지나친 설명을 경계하며, 자신의 테크닉과 연상의 힘을 놀라울 만큼 알맞게 배합한다. 표현의 신중함, ‘공포(gore)’에 대한 기피는 앞서 말했듯이 정신의 고양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작품 속 겸허함은 그 무엇보다도 인상적이다. 형태나 언어, 그 어디에서도 짓누름이나 허세를 찾아볼 수가 없다. 작가는 자신이 만든 형상들 앞에 선 우리를 자유롭게 놓아 두며, 두려움과 눈부심 사이에서 우리는 조금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어떻게 그것들을 바라볼지 망설인다… 배회하는 죽음을 끊임없이 마주하는 이토록 많은 사랑에 대한 열망의 표현들, 산 자의 세상에서 쫓겨난 듯 모욕을 당하고, 비탄에 빠진 이토록 많은 형상들,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 ‘본질’에 이르기 위해 발산하는 이토록 강한 열기,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각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종교가 될 것이다.

 

마치 신비로운 변화의 정신적 단계처럼, 도자 조각들은 합창의 방식으로 공간에 서로 어우러져, 목소리를 모아 감정의 풍경을 펼쳐 보이고자 서로를 채워준다. 이런 점에서, 보배(Beauvais) 레지던시에서 작업한 최근 작품들을 로스트로포비치 오디토리옴 옛 지하 납골당에서 전시하게 된 작가의 기쁨을 우리는 함께 나누어 볼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이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되는 것을 특별히 원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공간 구성에 있어 작가는 카톨릭 신자인 프랑스 극작가 앙리 게옹(1875-1944)의 시 <예수의 거울. 묵주의 신비>, 프랑스 작곡가 앙드레 카프레(1878-1925)가 1923년 여성 합창단을 위해 절제된 음악으로 만들어 낸, 이 시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 영향은 이번에 작가가 선보이는 규모가 큰 작품에 붙여진 이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땅 위에 너무나도 발가벗은>,< 풀밭에 그를 두고 왔다 >, <죽음을 놀라게 할 것이다> 등은 성모 마리아,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의 ‘거울’이라 여긴 아들 예수를 위해 바친 헌신적 생의 한 가운데에서 겪은 신비에 대한 명상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혼합된 우울과 환희, 평온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들. 마음의 전환, 충만함을 향한 길과 같은 도자와 흙. 고귀한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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